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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6세 드 에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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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두앵 6세 드 에노는 에노 백작 보두앵 5세와 플랑드르 백작부인 마르가레트 1세의 아들로, 플랑드르 백작, 에노 백작, 그리고 라틴 제국 황제를 역임했다. 그는 샹파뉴의 마리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으며, 제4차 십자군에 참여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라틴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불가리아 군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고,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다. 그의 죽음 이후에는 '가짜 보두앵'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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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6세 드 에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보두앵 1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보두앵 1세
칭호로마인의 황제 겸 전제군주
재위 기간1204년 – 1205년
대관식1204년 5월 16일 (하기아 소피아)
후임앙리 드 플랑드르
플랑드르 백작재위: 1194년 – 1205년
전임: 마르그리트 1세 및 보두앵 8세
후임: 잔
에노 백작재위: 1195년 – 1205년
전임: 보두앵 5세
후임: 잔
배우자마리 드 샹파뉴
자녀
마르그리트 2세
가문플랑드르 가문
아버지보두앵 5세
어머니마르그리트 1세
출생일1172년 7월
출생지발랑시엔, 에노, 프랑스 왕국
사망일1205년경 (약 32–33세)
사망지타르노보, 불가리아 (현재의 벨리코 타르노보, 불가리아)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작위 정보
전임(비잔티움 황제로서 알렉시우스와 콘스탄티누스)
후임앙리
칭호라틴 제국의 황제
임기1204년 - 1205년
기타 정보
네덜란드어보두에인
프랑스어보두앵

2. 초기 생애와 가족

보두앵은 에노의 보두앵 5세와 플랑드르의 마르가레트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1] 그의 누나 에노의 이자벨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의 왕비였다.

1186년, 보두앵은 샹파뉴의 앙리 1세의 딸인 샹파뉴의 마리와 결혼했다.[4] 몽의 기슬베르에 따르면, 보두앵은 어린 신부에게 열렬히 빠져 있었지만, 마리는 결혼 생활보다 기도에 더 헌신적이었다고 한다.[6]

마리와의 결혼을 통해 보두앵은 예루살렘 왕국 및 십자군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마리의 오빠 샹파뉴의 앙리 2세는 예루살렘 왕이었고, 마리의 삼촌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제3차 십자군에 참여했다. 보두앵의 외할머니는 예루살렘의 이사벨라 1세 여왕의 고모였으며, 플랑드르 백작들은 예루살렘의 친척들을 돕고자 했다.

1194년 어머니 마르가레트가 사망하자 보두앵은 플랑드르 백작이 되었고, 이듬해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에노 백작을 겸하게 되었다.

2. 1. 플랑드르와 에노 백작 가문

에노의 보두앵 5세와 플랑드르의 마르가레트 1세의 아들인 보두앵은, 삼촌인 플랑드르의 필리프 1세가 1177년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후, 필리프 1세가 필리프 2세의 주요 고문으로 임명되면서 상속자로 지명되었다.[1] 1년 후, 필리프 1세는 자신의 조카인 에노의 이자벨과 필리프 2세를 결혼시키고 아르투아 백작령을 지참금으로 주었는데, 이는 보두앵 5세를 불쾌하게 했다.[2] 1184년, 보두앵 5세는 사위인 필리프 왕의 편에 서서 딸의 이익을 위해 개입했다.[3]

필리프 백작의 부인이 사망한 후, 필리프 2세는 베르망두아 지방을 장악했고, 필리프 백작은 재혼했다. 필리프 백작은 1186년 필리프 2세, 보두앵 5세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베르망두아의 할양을 인정했지만, 베르망두아 백작 칭호는 유지했다. 1191년 필리프 백작이 사망하고, 플랑드르는 에노의 보두앵 5세에게 계승되었다.[3] 보두앵 5세는 결혼을 통해 플랑드르의 보두앵 8세로 통치했고,[3] 1194년 마르가레트 백작부인이 사망하자 플랑드르는 장남 보두앵 9세에게 상속되었다.[3]

1186년, 보두앵은 샹파뉴의 앙리 1세의 딸인 샹파뉴의 마리와 결혼했다.[4] 몽의 기슬베르는 보두앵이 어린 신부에게 열렬했지만, 신부는 기도에 더 전념했다고 묘사한다.[6]

마리를 통해 보두앵은 성지 수호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마리의 형제 샹파뉴의 앙리 2세는 예루살렘 왕이었고, 마리의 삼촌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제3차 십자군에 참여했다. 보두앵의 가족도 예루살렘 방위에 참여했는데, 그의 삼촌 필리프는 십자군 원정 중 사망했다. 보두앵의 외할머니는 예루살렘의 이사벨라 1세 여왕의 고모였고, 플랑드르 백작들은 예루살렘 친척들을 돕고자 했다. 1194년, 보두앵은 플랑드르 백작이 되었고, 다음 해에 에노를 계승했다.

에노 백작 보두앵 5세와 마르그리트 달자스의 장남으로,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의 왕비 이자벨 드 에노는 그의 누나이다. 1191년에 사망한 그의 삼촌 필리프 달자스에게 자녀가 없었기에, 어머니 마르그리트는 아버지와 함께 플랑드르 백작이 되었다.

1186년에 샹파뉴 백작 앙리 1세의 딸 마리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국 및 십자군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1194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플랑드르 백작이 되었고, 이듬해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에노 백작을 겸하게 되었다.

1180년 누나 이자벨이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결혼했을 때, 플랑드르 백작령에서 아르투아 백작령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지참금으로 가져왔지만, 1190년 이자벨이 사망하자 보두앵은 이를 되찾기 위해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존 및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와 손을 잡고 필리프 2세와 싸워 1200년 조약으로 대부분을 반환받았다.

2. 2. 프랑스 왕실과의 관계

에노의 보두앵 5세와 플랑드르의 마르가레트 1세의 아들인 보두앵은 프랑스 왕실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1180년, 보두앵의 누이 에노의 이자벨이 필리프 2세와 결혼하면서 아르투아 백작령을 포함한 플랑드르 영토가 지참금으로 넘어가면서 에노의 보두앵 5세를 불쾌하게 했다.[2] 1180년부터 필리프 2세와 플랑드르의 필리프 1세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여 피카르디일드프랑스가 황폐화되었다. 에노의 보두앵 5세는 처음에는 플랑드르의 필리프 1세와 동맹을 맺었으나, 1184년 딸의 이익을 위해 사위인 필리프 왕을 대신하여 개입했다.[3]

1190년 이자벨이 사망하자 보두앵은 지참금으로 넘어간 영토를 되찾기 위해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 존 및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와 손을 잡고 필리프 2세와 싸웠고, 1200년 조약으로 대부분을 반환받았다.

2. 3. 샹파뉴의 마리와의 결혼

1186년, 어린 보두앵은 샹파뉴 백작 앙리 1세와 샹파뉴 백작 마리 드 프랑스의 딸인 샹파뉴의 마리와 결혼했다.[4] 몽의 기슬베르는 보두앵이 어린 신부에게 열렬히 빠져 있었지만, 신부는 결혼 생활보다 기도를 더 좋아했다고 묘사한다.[6]

이러한 정리 직후, 에노 백작의 아들인 13세의 보두앵은 샤토티에리에서 샹파뉴 백작의 여동생인 12세의 마리를 아내로 맞이했다. 이 마리는 매우 어린 나이에 기도, 철야 기도, 단식, 구제에 자신을 바쳤다. 그녀의 남편 보두앵은 젊은 기사로서, 순결한 삶을 살면서 다른 모든 여자들을 경멸하고, 어떤 남자에게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열정적인 사랑으로 그녀만을 사랑하기 시작하여, 오직 그녀에게만 헌신하고 그녀만으로 만족했다. 성대한 결혼식 축하연은 발랑시엔에서 많은 기사와 귀부인들, 그리고 모든 계급의 사람들과 함께 거행되었다.프랑스어 [6]

마리를 통해 보두앵은 성지 수호자들과 추가적인 관계와 의무를 갖게 되었다. 마리의 오빠인 샹파뉴의 앙리 2세는 1190년대에 예루살렘 왕이었으며(팔레스타인의 영토를 유지하고 되찾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미망인과 두 딸을 남겼다), 마리의 삼촌인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제3차 십자군에 참여했다.[4]

3. 플랑드르와 에노 백작

이프르에서 보두앵 9세 치하에 주조된 AR 메이유 또는 '쁘띠 드니어'


에노 백작 보두앵 5세와 플랑드르 백작 티에리 달자스의 딸 마르그리트 달자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의 왕비 이자벨 드 에노는 그의 누나이다. 1191년 그의 삼촌이자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달자스가 사망했을때 자녀가 없었기에, 어머니 마르그리트는 아버지와 함께 플랑드르 백작이 되었다.

1186년 샹파뉴의 마리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국 및 십자군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1194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플랑드르 백작이 되었고, 이듬해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에노 백작을 겸하게 되었다.

1180년 누나 이자벨이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결혼했을 때, 아르투아 백작령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지참금으로 가져왔지만, 1190년 이자벨이 사망하자 보두앵은 이를 되찾기 위해 필리프 2세와 대립했다.

3. 1. 상속과 통치

발두앵은 알사스의 필리프가 발두앵의 누이 이자벨 드 에노의 지참금으로 제공한 아르투아를 포함한 상당한 영토와 그의 아내에게 주어진 또 다른 상당한 영토가 줄어들어, 크기가 훨씬 축소된 플랑드르 백국을 상속받았다. 이자벨은 1190년에 사망했지만, 필리프 왕은 미래의 프랑스 루이 8세가 될 이자벨의 아들을 위해 여전히 그녀의 지참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플랑드르에서 발두앵이 통치한 8년은 이 땅의 일부를 회복하려는 그의 시도로 특징지어진다.[7] 필리프 2세가 발두앵의 형제인 남쉬르의 필리프를 포로로 잡자, 발두앵은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휴전에 동의해야 했다. 페론 조약은 1200년 1월 발두앵이 전쟁 중 획득한 영토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체결되었다.[8] 발두앵은 필리프 2세의 봉신이 되었고, 왕은 아르투아의 일부를 발두앵에게 돌려주었다.[9][10]

프랑스 왕에 대한 이 싸움에서 발두앵은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잉글랜드의 존, 그리고 독일 왕 오토 4세를 포함하여 필리프와 다툼이 있던 다른 사람들과 동맹을 맺었다. 조약 체결 한 달 후인 1200년 2월 23일 수요일(재의 수요일), 브뤼헤에서 발두앵은 십자군에 참여할 것을 맹세하는 십자군 징표를 받았다.[11] 그는 그 후 2년 동안 준비를 하고 1202년 4월 14일 출발했다.

발두앵은 자신의 영토를 질서 있게 남기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에노 백국을 위해 두 개의 주목할 만한 칙령을 발표했다. 하나는 광범위한 형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현재는 사라진 그의 아버지의 칙령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상속에 대한 구체적인 규칙을 규정했다. 이것은 벨기에의 법적 전통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12]

발두앵은 두 살 된 딸과 임신한 아내인 마리 백작 부인을 남겨두고 떠났다. 마리는 플랑드르와 에노에서 남은 2년 동안 발두앵을 대신하여 섭정을 했지만, 1204년 초에는 두 자녀를 남겨두고 동방으로 그를 따라갔다. 그들은 몇 년 후에 돌아올 것으로 예상했지만, 결국 그들 중 누구도 자녀나 고향을 다시 보지 못했다. 그들이 없는 동안, 발두앵의 동생 남쉬르의 필리프가 딸들의 양육권을 가지고 플랑드르의 섭정이었고, 발두앵의 삼촌인 티의 윌리엄(에노의 보두앵 4세의 사생아)이 에노의 섭정이었다.[13]

3. 2. 프랑스와의 갈등

발두앵은 알사스의 필리프가 발두앵의 누이 이자벨 드 에노의 지참금으로 제공한 아르투아를 포함한 상당한 영토와 그의 아내에게 주어진 또 다른 상당한 영토가 줄어들어, 크기가 훨씬 축소된 플랑드르 백국을 상속받았다. 이자벨은 1190년에 사망했지만, 필리프 왕은 미래의 프랑스 루이 8세가 될 이자벨의 아들을 위해 여전히 그녀의 지참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플랑드르에서 발두앵이 통치한 8년은 이 땅의 일부를 회복하려는 그의 시도로 특징지어진다.[7] 필리프 2세가 발두앵의 형제인 남쉬르의 필리프를 포로로 잡자, 발두앵은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휴전에 동의해야 했다. 페론 조약은 1200년 1월 발두앵이 전쟁 중 획득한 영토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체결되었다.[8] 발두앵은 필리프 2세의 봉신이 되었고, 왕은 아르투아의 일부를 발두앵에게 돌려주었다.[9][10]

프랑스 왕에 대한 이 싸움에서 발두앵은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잉글랜드의 존, 그리고 독일 왕 오토 4세를 포함하여 필리프와 다툼이 있던 다른 사람들과 동맹을 맺었다. 조약 체결 한 달 후인 1200년 2월 23일 수요일(재의 수요일), 브뤼허에서 발두앵은 십자군에 참여할 것을 맹세하는 십자군 징표를 받았다.[11] 그는 그 후 2년 동안 준비를 하고 1202년 4월 14일 출발했다.

3. 3. 제4차 십자군 참여 결정

1200년 2월 23일 수요일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브뤼헤(Bruges)에서 발두앵은 십자군에 참여할 것을 맹세하는 십자군 징표를 받았다.[11] 그는 그 후 2년 동안 준비를 하고 1202년 4월 14일 출발했다.

발두앵은 자신의 영토를 질서 있게 남기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에노 백국(County of Hainaut)을 위해 두 개의 주목할 만한 칙령을 발표했다. 하나는 광범위한 형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현재는 사라진 그의 아버지의 칙령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상속에 대한 구체적인 규칙을 규정했다. 이것은 벨기에의 법적 전통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12]

발두앵은 두 살 된 딸과 임신한 아내인 마리 백작 부인을 남겨두고 떠났다. 마리는 플랑드르 백국(Flanders (county))과 에노에서 남은 2년 동안 발두앵을 대신하여 섭정을 했지만, 1204년 초에는 두 자녀를 남겨두고 동방으로 그를 따라갔다. 그들은 몇 년 후에 돌아올 것으로 예상했지만, 결국 그들 중 누구도 자녀나 고향을 다시 보지 못했다. 그들이 없는 동안, 발두앵의 동생 남쉬르의 필리프(Philip of Namur)가 딸들의 양육권을 가지고 플랑드르의 섭정이었고, 발두앵의 삼촌인 티의 윌리엄(에노의 발두앵 4세의 사생아)이 에노의 섭정이었다.[13]

한편, 자신들의 생계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자금이 절실했던 제4차 십자군 지도자들은 망명 중이던 비잔티움 왕자 알렉시오스(미래의 알렉시오스 4세 앵겔로스 황제)가 삼촌 알렉시오스 3세 앵겔로스 황제를 축출하고 그의 아버지 이사악 2세 앵겔로스를 해방하는 데 도움을 주는 대가로 보급품과 돈을 제공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로 방향을 바꾸도록 설득되었다.

4. 라틴 제국 황제

황제로서의 발두앵의 인장


라틴 제국봉건제 원리에 따라 조직되었다. 황제는 정복한 영토의 일부를 받은 제후들의 봉건적 상급자였다. 1204년 10월, 보두앵은 그리스 귀족들이 이전에 소유했던 땅을 점령한 600명의 기사들에게 영지를 할당했다.[14] 그의 특별한 영지는 콘스탄티노플 시, 유럽과 아시아 측의 인접 지역, 일부 외곽 지역, 그리고 렘노스섬, 레스보스섬, 히오스섬, 테노스섬을 포함한 여러 섬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영토들은 아직 정복해야 했고, 우선 트라키아의 그리스인들의 저항을 분쇄하고 테살로니키를 확보해야 했다.

1204년 여름, 보두앵은 마케도니아에서 광대한 영토를 받고 테살로니키 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몽페라의 보니파시오와 충돌했다. 보니파시오는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왕국에 충성하지 않기를 바랐고, 테살로니키로 진군하자는 보두앵의 제안에 반대했다. 보두앵은 테살로니키로 가는 것을 고집했고, 보니파시오는 보두앵이 총독을 임명했던 아드리아노플을 포위 공격했다. 블루아의 루이 1세 백작의 노력으로 협상이 이루어져, 보니파시오는 황제로부터 테살로니키를 봉토로 받고 그리스 정복을 위한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이듬해 겨울(1204-1205년) 프랑크인들은 비티니아에서 정복 사업을 추진했고, 보두앵의 형제인 플랑드르의 앙리도 참여했다. 그러나 2월에 그리스인들은 트라키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들은 동맹 제의를 황제가 거절했던 불가리아 차르 칼로얀의 지원에 의존했다. 아드리아노플의 수비대는 쫓겨났다. 보두앵은 엔리코 단돌로, 블루아의 루이 1세, 빌라르두앵의 제프루아와 함께 그 도시를 포위 공격하기 위해 진군했다. 1205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프랑크 기사들은 패배했고, 블루아 백작은 살해되었으며, 보두앵은 불가리아인들에게 포로로 잡혔다.[14]

4. 1. 제4차 십자군과 콘스탄티노플 점령

1848년 건축된 불가리아 베리코 타르노보 차레베츠 요새에 있는 발두앵의 탑


황제 직위는 처음에 베네치아 총독 엔리코 단돌로에게 제안되었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러자 몽페라의 보니파시오와 발두앵 사이에 선택이 이루어졌다. 보니파시오는 비잔틴 궁정과의 관계 때문에 유력한 후보로 여겨졌지만, 발두앵은 젊고 용감하며 경건하고 덕이 있는 인물이었고, 십자군 서약을 엄격하게 해석하고 준수한 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으며, 십자군 원정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였다.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아 1204년 5월 9일에 선출되었고, 5월 16일에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비잔틴 관습을 거의 그대로 따른 의식으로 즉위식을 거행했다.[13] 즉위식에서 발두앵은 비잔티움 황제 마누일 1세 콤네노스가 62000 실버 마크에 구입한 매우 값비싼 보석을 착용했다. 발두앵의 아내 마리는 아크로 항해하여 이러한 사건들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남편이 황제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1204년 8월에 그와 합류하기 전에 사망했다.

라틴 제국은 봉건제 원리에 따라 조직되었다. 황제는 정복한 영토의 일부를 받은 제후들의 봉건적 상급자였다. 1204년 10월, 그는 그리스 귀족들이 이전에 소유했던 땅을 점령한 600명의 기사들에게 영지를 할당했다.[14] 그의 특별한 영지는 콘스탄티노플 시, 유럽과 아시아 측의 인접 지역, 일부 외곽 지역, 렘노스섬, 레스보스섬, 히오스섬, 테노스섬을 포함한 여러 섬으로 구성되었다. 이 영토들은 아직 정복해야 했고, 우선 트라키아 그리스인들의 저항을 분쇄하고 테살로니키를 확보해야 했다. 1204년 여름, 발두앵은 제국의 경쟁 후보였던 몽페라의 보니파시오와 이 문제로 충돌했는데, 보니파시오는 마케도니아에서 광대한 영토를 받고 테살로니키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보니파시오는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왕국에 충성하지 않기를 바랐고, 발두앵의 테살로니키 진군 제안에 반대했다. 플랑드르인과 롬바르드인 사이의 적대감이 다툼을 악화시켰다. 발두앵은 테살로니키로 가는 것을 고집했고, 보니파시오는 발두앵이 총독을 임명했던 아드리아노플을 포위 공격했다. 내전이 불가피해 보였다. 단돌로와 블루아의 루이 1세 백작의 노력으로 협상이 이루어졌다. 보니파시오는 황제로부터 테살로니키를 봉토로 받았고, 그리스 정복을 위한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이듬해 겨울(1204-1205년) 프랑크인들은 비티니아에서 정복 사업을 추진했는데, 발두앵의 형제인 플랑드르의 앙리도 참여했다. 그러나 2월에 그리스인들은 트라키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들은 동맹 제의를 황제가 거절했던 불가리아 차르 칼로얀의 지원에 의존했다. 아드리아노플의 수비대는 쫓겨났다. 발두앵은 단돌로, 블루아 백작, 역사가 빌라르두앵의 제프루아와 함께 그 도시를 포위 공격하기 위해 진군했다. 프랑크 기사들은 1205년 4월 14일 전투에서 패배했고, 블루아 백작은 살해되었으며, 황제는 불가리아인들에게 포로로 잡혔다(아드리아노플 전투 참조).

4. 2. 황제 선출과 즉위

엔리코 단돌로에게 황제의 관이 제안되었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 후, 몽페라의 보니파시오와 발두앵 사이에 선택이 이루어졌다. 보니파시오는 비잔틴 궁정과의 관계로 유력한 후보로 여겨졌지만, 발두앵은 젊고 용감하며 경건하고 덕이 있는 인물이었고, 십자군 서약을 엄격하게 해석하고 준수한 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으며, 십자군 원정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였다.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아 그는 1204년 5월 9일에 선출되었고, 비잔틴 관습을 거의 그대로 따른 의식으로 5월 16일에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13] 즉위식에서 발두앵은 비잔티움 황제 마누일 1세 콤네노스가 62000실버마크에 구입한 매우 값비싼 보석을 착용했다. 발두앵의 아내 마리는 이러한 사건들을 알지 못한 채 아크로 항해했다. 그녀는 남편이 황제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와 합류하기 전인 1204년 8월에 사망했다.

4. 3. 라틴 제국의 통치와 갈등

엔리코 단돌로에게 황제의 관이 제안되었으나, 그는 거절했다. 몽페라의 보니파시오가 유력한 후보로 여겨졌지만,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아 발두앵이 1204년 5월 9일에 황제로 선출되었고, 5월 16일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가졌다.[14] 발두앵의 아내 마리는 남편이 황제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와 합류하기 전인 1204년 8월에 사망했다.

라틴 제국은 봉건제 원리에 따라 조직되었다. 황제는 정복한 영토 일부를 받은 제후들의 봉건적 상급자였다. 1204년 10월, 발두앵은 그리스 귀족들이 소유했던 땅을 점령한 600명의 기사들에게 영지를 할당했다.[14] 그의 특별한 영지는 콘스탄티노플 시, 유럽과 아시아 측의 인접 지역, 일부 외곽 지역, 렘노스섬, 레스보스섬, 히오스섬, 테노스섬을 포함한 여러 섬이었다.

보니파시오는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왕국에 충성하지 않기를 바랐고, 테살로니키로 진군하자는 발두앵의 제안에 반대했다. 발두앵은 테살로니키로 가는 것을 고집했고, 보니파시오는 발두앵이 총독을 임명했던 아드리아노플을 포위 공격했다. 블루아의 루이 1세 백작의 노력으로 협상이 이루어졌다. 보니파시오는 황제로부터 테살로니키를 봉토로 받았고, 그리스 정복을 위한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이듬해 겨울(1204-1205년) 프랑크인들은 비티니아에서 정복 사업을 추진했는데, 발두앵의 형제인 플랑드르의 앙리도 참여했다. 그러나 2월에 그리스인들은 트라키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들은 불가리아 차르 칼로얀의 지원에 의존했다. 아드리아노플의 수비대는 쫓겨났다. 발두앵은 그 도시를 포위 공격하기 위해 진군했다. 프랑크 기사들은 패배했고(1205년 4월 14일), 황제는 불가리아인들에게 포로로 잡혔다(아드리아노플 전투 참조).

4. 4. 아드리아노플 전투와 죽음

1204년 아드리아노플의 수비대는 쫓겨났다. 보두앵엔리코 단돌로, 블루아의 루이 1세, 빌라르두앵의 제프루아와 함께 그 도시를 포위 공격하기 위해 진군했다. 프랑크 기사들은 1205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패배했고, 블루아 백작은 살해되었으며, 보두앵은 불가리아인들에게 포로로 잡혔다.[14]

보두앵의 운명은 한동안 불확실했고, 그 사이 그의 형제인 앙리가 섭정을 맡았다. 이듬해 7월 중순이 되어서야 그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보두앵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정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처음에는 귀중한 인질로서 잘 대우받았던 것 같지만, 갑작스러운 분노의 발작으로 칼로얀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아마도 프랑크인의 손에 넘어간 필리포폴리스의 반란 때문일 것이다. 불가리아 전설에 따르면, 보두앵은 칼로얀의 아내를 유혹하려다 몰락했다고 한다. 역사가 조르주 아크로폴리테스는 칼로얀이 약 400년 전 니케포루스 1세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보두앵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칼로얀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보두앵이 감옥에서 죽었다고 보고했다. 중세 불가리아 수도인 츠레베츠 요새의 한 탑은 여전히 보두앵의 탑이라고 불리는데, 전설에 따르면 그가 수감되었던 탑이라고 한다.

콘스탄티노플의 라틴인들은 1206년 7월에야 보두앵이 죽었다는 확실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의 형제인 앙리가 8월에 황제로 즉위했다.

5. 유산과 영향

보두앵 6세의 죽음은 플랑드르와 에노 백작령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 특히 1225년에 발생한 '가짜 보두앵' 소동은 그의 유산과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 남자는 자신이 보두앵이라고 주장하며 백작령 통치권을 요구했고, 많은 이들이 그를 지지했다.[16]

'가짜 보두앵'은 실제 보두앵처럼 행동하며 기사 작위를 수여하고 법령에 서명하는 등 사람들을 현혹시켰다.[15] 심지어 잉글랜드 왕 헨리 3세까지 동맹을 제안할 정도였다.[15] 그러나 프랑스 왕 루이 8세의 심문 결과, 그는 보두앵의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고, 결국 사기꾼으로 판명되었다.[15] 그는 발랑시엔으로 도주했으나 곧 체포되어 잔에게 압송되었고,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15][17]

이 소동은 보두앵 6세 사후 권력 공백과 그를 둘러싼 여러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음을 보여준다.

5. 1. 플랑드르와 에노의 계승

보두앵 6세가 사망한 후, 플랑드르와 에노의 계승은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보두앵 6세의 사망 소식이 확실해지기 전까지 그의 형제인 앙리가 섭정을 맡았다. 1206년 7월에야 보두앵 6세의 사망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고, 앙리는 그해 8월에 황제로 즉위했다.

하지만 플랑드르에서는 보두앵의 생사에 대한 의문이 계속되었다. 보두앵의 또 다른 형제인 남뷔르의 필립이 섭정을 맡았고, 결국 보두앵의 두 딸인 조안과 마르가레트 2세가 플랑드르 백작 부인 자리를 이어받았다.

1225년, 죽은 줄 알았던 보두앵이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플랑드르에 나타났다. 그는 농민 계층의 지지를 얻었지만, 십자군 원정(crusade) 이전에 보두앵을 알았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결국 이 남자는 베르트랑 드 레이라는 부르고뉴 농노로 밝혀져 1226년에 처형되었다.

에노 연대기에 따르면, 플랑드르와 에노 총독 아르눌프 드 가브르는 발랑시엔에서 프란체스코회 수사복을 입은 삼촌 조스 드 마테른을 만났고, 그로부터 20년간 포로 생활을 하다 불가리아에서 탈출한 보두앵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15] 리메 연대기에는 필리프 무스케가 당시 상황을 기록하며, 정체불명의 인물이 보두앵의 귀환을 선포하고 자금을 배포했다고 전한다.[15]

1225년, 투르네와 발랑시엔 사이 숲, 몰타뉴 근처의 은둔자가 자신이 보두앵이라고 주장하며, 장느에게 플랑드르 백작령과 에노 백작령 통치권을 요구했다.[16] 그는 진짜 보두앵처럼 행동하며 기사 작위를 수여하고 법령에 서명했다.[15] 그는 에노 백작령 귀족들과 플랑드르 및 에노 대부분 도시의 지지를 얻었다. 심지어 잉글랜드 왕 헨리 3세도 프랑스 왕에 대한 동맹 갱신을 제안했고, 브라반트 공국과 림부르크 공국도 그를 지지했다.[15]

장느는 몽스로 피신해야 했고, 루이 8세는 장느의 권리 회복을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17] 루이 8세는 보두앵을 자칭하는 자와 만나 그를 심문했고, 그는 자신이 보두앵임을 제대로 증명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사기꾼으로 판명되어 발랑시엔으로 도망쳤으나, 도시는 프랑스군에 의해 함락되었다.[15] 가짜 보두앵은 붙잡혀 장느에게 압송되었고, 처형되지 않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리르의 성문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17]

보두앵 6세는 1186년 샹파뉴 백작 앙리 1세의 딸 마리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이름생몰년비고
잔느1194/1200년 - 1244년플랑드르 백작 부인, 에노 백작 부인 (1205년 - 1244년)
마르그리트 2세1202년 - 1280년플랑드르 백작 부인 (1244년 - 1247년, 1251년 - 1278년), 에노 백작 부인 (1244년 - 1246년, 1257년 - 1280년)


5. 2. '가짜 보두앵' 소동

1225년, 보두앵 6세가 사망한 지 20년 후, 자신이 보두앵이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플랑드르에 나타나 플랑드르 백작령과 에노 백작령의 통치권을 요구했다.[16] 그는 보두앵처럼 행동하며 기사 작위를 수여하고 법령에 서명하면서 에노 백작령 귀족들과 여러 도시들의 지지를 빠르게 얻었다.[15] 잉글랜드 왕 헨리 3세도 그를 지지하며 동맹을 제안했다.[15]

그러나 보두앵의 딸 잔은 이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잔의 고문은 그가 진짜 보두앵이라고 확신했지만, 다른 증인들은 회의적이었다.[15] 결국 잔은 프랑스 왕 루이 8세의 도움을 받아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루이 8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잔의 권리 회복을 돕는 대가로 상당한 금액과 도시의 대리인 임명권을 요구했다.[17]

루이 8세는 군사 작전 전에 보두앵을 자칭하는 자와 만나 그의 과거에 대해 질문했다. 그는 자신이 언제 어디서 기사 작위를 받았는지, 결혼식 날 밤은 어땠는지 등 세부 사항을 기억하지 못했다.[15] 주교들은 그를 사기꾼으로 판단했고, 루이 8세는 그에게 떠날 것을 명령했다.[15]

가짜 보두앵은 발랑시엔으로 도망쳤지만, 도시는 프랑스군에 의해 빠르게 탈환되었다.[15] 결국 그는 붙잡혀 잔에게 압송되었고, 잔은 그를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형틀에 세운 후 교수형에 처했다.[17] 이 사건의 배후에는 잔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의 전 남편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5]

이 가짜 보두앵은 부르고뉴 농노 출신의 베르트랑 드 레이로 밝혀졌으며, 1226년에 처형되었다.

참조

[1] 논문
[2] 논문
[3] 논문
[4] 논문
[5] 문서 Baldwin was in fact 14 years old when he married Marie of Champagne in 1186.
[6] 논문
[7] 논문
[8] 서적 Romancing the Past: The Rise of Vernacular Prose Historiography in Thirteenth-century France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5-02-21
[9] 서적 The Hutchinson Dictionary of Ancient & Medieval Warfare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15-02-21
[10] 서적 The Rise of the Medieval World, 500-1300: A Biographical Dictionary https://books.google[...] Greenwood Publishing Group 2015-02-21
[11]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ume II: the later Crusades 1189–1311 London and Madison
[12] 논문
[13] 논문
[14] 서적 The Franks in the Aegean: 1204–1500 Routledge
[15] 서적 Jeanne de Constantinople, comtesse de Flandre et de Hainaut Somogy
[16] 서적 Présence de l'au-delà: une vision médiévale du monde https://books.google[...]
[17] 서적 Jeanne de Constantinople, comtesse de Flandre et de Hainaut Som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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